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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단문] 꿈을 꿨어요 작성일2025.12.08 조회285

작성자애쿼머린

인천항 : 크로마이트호 스토리 스포일러 포함
인물 대사들 살짝 날조
퇴고 X
슬비의 꿈속에서 나온 불꽃의 딸

 
 
 
 
 
 
 
 
 
 

안녕하세요, 나의 원수님.”
 

이슬비는 아마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름에 눈을 떴다. 왜 자신을 부른 것 같다고 눈을 떴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렇게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일련의 행동들을 물 흐르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하다가, 불현 듯 중간에 알아차린 묘한 기분.
 
마치 누군가의 농간에 제대로 당해버려서 나의 정신과 몸이 따로 놀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기분.
 
이런 꼭두각시놀음을 잘 하는 이를, 이슬비는 그런 놀음을 좋아하는 인물을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이슬비가 속으로 생각해낸 인물은 바로 이슬비 눈앞에 있었다.
 
이슬비는 무척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불꽃의 딸……?”
어머, 아직도 절 그렇게 불러주시는군요? 기뻐라.”

 
이슬비가 불꽃의 딸이라고 부른 여자는 정말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와는 별개로 이슬비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분명 죽은 몸이다! 심지어 그녀의 죽음을 제일 가까이서 확인한 것 또한 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예의 그 이상한(?) 교주 복장을 깔끔하게 입고서 나타났다니. 불꽃의 딸이 행했던 지난 악행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면서 이슬비는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 살아 있었던 거야? 그게 아니라면…….”
, 나의 원수님이 걱정하는 일은 전부 해당되지 않아요. 이건 그저 꿈이랍니다.”
?”
그래요, 제가 당신의 꿈속에 나타난 것뿐이에요. 은근 흔한 일이잖아요? 과거의 인물이 꿈속에서 모습을 내비치는 것.”
…….”

 
널 꿈속에서 다시 볼만큼 좋은 인연은 아니었는데. 굳이 원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왕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불꽃의 딸이 아니라…….

 
어머, 서운해라. 절 앞에 두고 다른 사람 생각해서는 안 되죠, 나의 원수님?”
……지금 다른 가정을 생각하는 거야. 좀 최악이긴 하지만 네가 죽기 직전 나한테 불꽃의 세례를 심어놓았고, 그게 지금 모종의 이유로 발동이 되었다거나…….”
말 돌리시긴.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답 또한 알려드리죠. 전 당신에게 불꽃의 세례를 심지 않았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제가 당신의 꿈속에 이 모습으로 나타난 건 당신의 무의식이 바라던 결과예요.”
내 무의식이 너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믿기질 않았다. 아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슬비가 만들어냈다던 불꽃의 딸은 진짜 불꽃의 딸 같았다. 그렇기에 이슬비는 조금 께름칙했다. 자신의 무의식이라고 해도 이런 작자의 인격을 완벽히흉내 내어서 대면시킨다고? 불꽃의 세례가 심어진 게 아니냐고 의심을 한 것도 괜한 의심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이슬비의 얼굴을 보면서 불꽃의 딸은 여상히 투명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우린 최악의 형태긴 해도 각별한 사이이긴 했잖아요, 안 그래요?”

 
그게 아무래도 나의 원수님의 뇌리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이 된 거겠죠. 사람이란, 예의 강렬한 경험을 하면 아무리 잊고 싶어도 언뜻 떠오르기 마련이니까요.
 

저도 그랬어요. 제 수집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건 아무래도 아버지겠지만, 당신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상상이 가시나요? 무슨 노력을 해도 얻지 못하는 보물을 황망히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그 서글픈 심정을?”
그런 심정 하나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래요, 모르는 편이 나아요. 지금의 당신이 이런 저의 심경을 이해한다면 그건 당신의 가치를 퇴색시키는 일만 될 게 뻔하죠. 훌륭해요. 영특하네요.”
……됐고, 왜 그런 모습으로 날 찾아온 거야?”

 
흐음, 불꽃의 딸은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 고민하는 척 했다는 것은 고민했다고 하기엔 바로 용건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전언을 전해주고 싶어서 왔다고 해야 할까요?”
전언?”
당신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당신은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그럼에도 자기 자신은 고결한 인간인 채로 남고 싶어서, 부모님의 원수를 인간의 형상이 아닌, ‘차원종의 형상으로 투영하면서 살아왔다고 한 것 말이에요.”
…….”

 
그 말에 흔들렸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이젠 상관없는 일이었다. 동료들 덕택에 이겨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신랄하게 자신에게 망언을 내뱉고 있는 저 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망령이다.

 
당신은 정말이지 영특하네요. 저의 본질이 인간보다는 차원종에 가깝다는 걸 그 어린 나이에 깨우친 현인이에요.”
…….”
축하해요, 당신의 원수가 인간이 아닌 결국 차원종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처음부터 옳은 복수심을 갈고 닦았던 거예요.”
고작,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 나타난 거야?”

 
이슬비는 어이없어했다. 그걸 이런 형태로라도 나타나서 덧붙여야할 말인 건가? 이슬비의 눈앞에 있는 불꽃의 딸은 일단 자신이 진짜 불꽃의 딸이 아니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여기는 이슬비의 꿈속이니, 자신 또한 이슬비의 무의식 속 어떤 부분이 투영된 거라고 했다.
 
고작, 이라는 표현에 불꽃의 딸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굉장히 놀란 얼굴이었다.

 
고작이라고요? 앞으로 당신이 당신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던 사안 아닌가요?”
네가 만약 의 일부분이라고 한다면 이 말을 알고 있을 거야.”
…….”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른 동료들에게는 좀 다른 문장으로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있다. 불꽃의 딸이 아직도 인간일 거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서였다. 그때 이슬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걸 선택하는 건 그녀의 몫이겠죠.
 
이슬비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내렸었다. 혹여나 이번에 있었던 사건에 대입하여 어느 누군가가 이슬비를 질타를 한다고 쳐도, 여유롭게 받아칠 만큼.
 
이슬비와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어지는 불꽃의 딸의 대답은 모르는 상대가 자칫 이 대화를 들으면 좀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그래요, 괜한 걱정이었다는 거네요.”
그래, 괜한 걱정이었던 거 맞아.”
그리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가시는 거군요.”

 
매번 자신이 인간인지 재단을 여러모로 해야 하는. 이슬비는 산뜻하게 말했다.

 
이런 걸로 매번 힘들다고 하면 팀원들에게 내가 뭐가 되겠어.”
그래요, 그래야 내가 꼭 수집하고 싶었던 재보죠.”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건 관두도록 해.”
조언을 해주시는 게 너무 우습네요. 마치 그러시니 제가 어딘가에 꼭 살아있는 것 같잖아요!”

 
그렇다. 불꽃의 딸은 살아있다. 이론상으로는. 그러나 이슬비가 원수로 여기고 있던 불꽃의 딸은 이미 죽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이름을 뺏긴 것에 원통해했으나, 적어도 이슬비의 안에서만큼은 불꽃의 딸은 불꽃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 .”

 
불꽃의 딸이 중얼거렸다.

 
역시 나의 원수님. 제가 원하는 결말 따위 내려주시지를 않네요.”
…….”
하지만 그렇게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점이…… 정말 찬란하게 빛이 나죠.”

 
그 말을 끝으로 이슬비는 잠에서 깨어났다. 현실에서 눈을 떴을 때, 들렸던 건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살과,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료들의 숨소리였다.
 
이슬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을 만큼의 끔찍한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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