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조연들에 대한 날조격의 묘사가 있습니다.
*주관적인 캐해석이 많음에 주의
짙은 어둠이 깔린 알 수 없는 공간
이곳에 선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꿈...인가.., 일분 일초가 아까운 이 시점에 며칠 날 좀 샜다고 잠들다니 확실히 나도 늙긴 늙었어.”
이질감을 느끼고 깨어날 법도 하거늘 묘한 느낌이 드는 꿈
마치 꿈인걸 알아차렸으니 이젠 깨어나게 해달라는 그녀의 희망이 야속하게도 꿈의 주인은 응답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 뭐 이 정도로는 깨어나게 해 주지 않겠다는 건가?”
어디 한번 해 보자는 듯 소리친 그녀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따라 발걸음을 재빨리 옮기기 시작했다.
이내 허허벌판에 음료가 준비된 원형 카페 테이블을 가로등 불빛이 환히 비추고 있는 이질적인 풍경에
‘것 참, 여기 앉아달라고 광고하는 꿈은 또 처음 꿔 보는군.’
하고 마치 엉망진창인 대본을 받아든 연기자처럼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마지못해 응수해 주겠다는 듯 테이블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치 기다리면 누군가 찾아올 것만 같은 곳
아무도 없는 텅 빈 맞은편 의자에 누군가 다가와 마주 앉을 것 같은...
‘...나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시간을 재촉하는 듯한 초조한 다리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얼른 마셔버리고 자리를 뜰 셈이었으리라.
마치 기다리는 누군가가 오지 않았다는 듯, 약속을 바람맞아 화가 난 여인처럼 테이블 위의 음료 잔을 휙 하고 집어들어 한 모금 마신 찰나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들릴 리가 없는 익숙한 목소리기 들려왔다.
그녀는 얼굴을 확인하고 그만-
ㅡ주르륵
너무 놀란 탓이었을까?
마치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입 밖으로 노란 액체를 쏟아내고 만 것이었다.
남자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며 미소짓고는 맞은편에 앉아 그녀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랜만의 재회인데 이런 반응일 줄이야. 잘 지냈나 힐데가르트 베이르만?”
“루드비히? ...네가 왜?”
“그거야 꿈이니까.”
어쩌면 당연하지만 들으면 당황스러운 한 마디의 말.
“...그래, 이해했어. 그래서 지금 내게 하고싶은 말이 뭐길래 나타난거지?”
“...이렇게 간단하게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건가? 그건 나도 모르겠군.”
루드비히라고 불린 남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마주앉은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자네 지금 묻고 싶은 게 산더미라는 표정인데 정말로 내게 아무 것도 안 물어보고 넘어갈 테야?”
“이제 와서 뭘? 오랜만에 본 낮짝이라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
”아하하-! 여전하군 그래.“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하면서도 달싹거리는 입술을 감출 생각은 하지 않는 그 모습에 루드비히는 실소를 터트리고 만 것이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갑자기 나타나서 실없는 소리만 할 거면 나는 이만 간ㅡ“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려는 찰나
”그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나?“
남자가 내뱉은 질문이 힐데가르트 베이르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는 꽤나 오랜 침묵을 유지하다 자신이 이야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미소를 지으며 이전과는 다르게 한껏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덕분에. 미스틸테인, 루나, 소마, 세트 ... 모두 새로운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어. 좋은 어른들,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하, 다행이군. 그 아이들에겐 늘 미안한 마음 뿐이라네.“
죄책감일까, 움츠러든 어깨와 처진 눈을 보면서 그녀는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던 말을 녀석의 허상에나마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날 때 해 주고 싶었던 말은...’
”아무리 누가 뭐라 한들, 그 아이들에게 너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지켜낸 멋진 할아버지야 루드비히 크로이처.“
”... ‘멋진 할아버지’ 라... 과분한 호칭을 받아버린 것 같네만... 그렇다면 자네가 내 손주들의 멋진 할머니 쯤 되는 걸까?“
”멋진 할머니는 무슨, 마귀할멈이라고 부르지나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치 이 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듯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에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 봐야겠어.“
”잘 가게. 나중에, 아주 나중에 보자고.“
하는 작별 인사를 마무리하고는 익숙한 기운을 따라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 그 때
먼발치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자네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생기길 비네-!“
하는 그 말에 헛소리하지 말라며 뒤돌아 소리칠 법도 하거늘, 대꾸하면 괜히 미련만 남으리라 판단했을까
그녀는 피식 하는 작은 웃음만을 대답으로 남긴 채 앞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
얼마나 걸었을까 방 한켠에 도착했다.
”이번에는...기관 집무실이로군.“
총장은 익숙하다는 듯 발걸음을 옮겨 책상 위에 앉았다.
‘이번에는 누가 나오나 한번 보자고’
하고 속으로 단단히 벼르면서, 책상 위에 올려진 따뜻한 커피잔을 들어올리려는 그 때-
(턱-)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졌고
‘그래, 누구냐.’
벼르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손이 얹어진 반대편으로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한번을 안 당해주시다니-“
그 곳에는 마치 애인에게 볼 찌르기 장난을 실패해 아쉽다는 듯 검지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웃음기 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정?“
”네 힐다, 생각보다 빨리 뵙게 되어 저 역시 당황스럽군요“
벙 찐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이정이라 불린 남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어째서일까?
루드비히와의 만남에서 마음 속 한켠에 담아둔 말을 꺼내버린 탓일까?
그녀는 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놓은 말들이 가슴을 두들기다 못해 터져 나올것만 같은 느낌을 억누르려는 힐다의 떨리는 손을 맞잡고 눈을 올곧게 마주친 채 이정은 그녀 곁에 서 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 온기에 마침내 그녀는 입을 열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오랜 시간동안 마음 깊숙이 가둬둔 질문을 꺼내왔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지 그게 최선이었고. 하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때로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해. 이정... 나의 마지막 명령을... 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진리를 지켜내라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어?“
”...두려웠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당신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힐다.“
의외의 답변에 말문이 막힌 그녀를 뒤로한 채 이정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당신의 검으로써 당신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던졌고 이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짧게 침묵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수호한 진리가 인류를 미래로 이끌었으니 나의 희생이, ‘마견’의 의지가 헛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으리라.
”... 이렇게라도 대답을 들었으니 다행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어.“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고만 싶어진다
그의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질 것만 같다
이러한 생각에 가라앉아 침잠하듯 의자에 앉아 깊은 숨을 들이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그녀를 이정이 일으켜세웠다.
”힐다, 일어나세요. 당신은 여기서 주저앉아 울어서는 안 됩니다.“
”이정, 그만- 밀치지 마.“
집무실 바깥으로 밀어내는 그의 등쌀에 성을 내며 멈춰달라는 그녀의 말에도 이정은 멈추지 않았다.
”힐다, 이 곳은 지나간 시간이고 저는 과거의 망령일 뿐. 미련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 한걸음, 한걸음, 어둠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인류의 미래를 향해 모두와 함께 나아가주시길. 굳이 저의 사적인 부탁을 들어주고자 하시거든 인연도, 혈연도 닿지 않았지만 저의 의지를 이어받은 그 녀석에게 제가 전해달라고 말했다며 건네줄 안부인사를 생각해보시는 겁니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많으니 조금만 더 있게 해달라는 듯한 저항에도 그는 덤덤히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
그의 거칠면서도 다정한 손길.
작별인사를 위해 뒤도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 손길 덕에 힐데가르트는 가야할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뒤돌아 인사하는 대신 누군가 들으라는 듯한 말투로
”그 녀석 똥고집은 누구를 닮았나 했더니 이정 자네였어.“
하며 빈정거리고는 그곳을 떠났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에는 예상했던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온...“
”어서오게 힐다. 기다리고 있었다네.“
벤치에 앉은 레온 슈나이더는 그녀가 올 줄 알았다는 듯 홍차까지 우려놓고 어서 앉으라며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들겼다.
그녀는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자네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래,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서두르지 않아도 돼 힐다, 이 곳은 그 극작가가 관여할 수 없는 공간이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됐어.“
”자네 혹시 삐진 게야?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소년의 말에 힐데가르트는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거릴 뿐이다.
”답은 간단해. 저 곳엔 레옹 슈나이더가 있을 뿐 레온 슈나이더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잊혀지는 것 또한 죽음의 일환이지,“
그녀는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어쩌면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몰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우가
든든한 조력자이자 탐구자였던 협력자가
더 이상 힐데가르트의 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자 레온 슈나이더가 입을 열었다.
”....힐다, 나는 네게 감사하고 있어.“
”...뭐?“
예상치 못한 한 마디를 듣고 의문을 표하는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은 채 일단 들어보라는 듯 자신이 할 말만을 차분한 목소리와 진지한 어투로 주제를 이어나갔다.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로서 아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어.
아버지로서 주니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내던져 진리를 탐구했지.
최종적으로는 진리로써 인류가 나아갈 길을,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네.“
”...괜히 말 꺼냈다 얻어맞은 기분이군. 누가 전직 교수 아니랄까봐 생각하는 게 꽉 막힌 꼰대가 다 됐어.“
”하하, 칭찬으로 듣지.“
너무나 다행이라고, 이렇게라도 기회가 온 것이 행운이라며 홀가분하다는 듯 해맑은 웃음을 띈 아이의 얼굴로 이야기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대답이라면 얘기하진 못하겠어.’
하려고 했던 말을 씁쓸한 미소와 함께 집어삼킨다.
어떻게든 좋으니 내 말을 들으라는 듯 털어놓을 심산이었으나
만족하며 모든 것을 짊어지고 떠난 자 앞에서
사실은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아줬으면 했다고
홀로 남겨지는 것은 익숙하다며 허세부렸지만 실은 붙잡고 싶었다고
루드비히, 이정, 라나에 이어 레온 슈나이더 당신까지 떠나고 혼자 남겨지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고 그 누가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허나 척하면 착이라고 할까?
”힐다. 너라면 알겠지, 라나의 병을 고치겠다며 도피하고 그녀의 죽음을 외면했던 나의 후회를...“
”하, 이번에는 심리학 강의인가?“
”그런 셈 치지. 자네에게 이 말만은 전해야겠으니 말이야.“
레온 슈나이더 교수는 강의를 시작한다.
한 사람을 위한, 어쩌면 마지막이 될 ...
”이별에서 눈을 돌리려고 하지 말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침잠하며 뒤만 돌아보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 우리는 그 순서가 조금 빨리 찾아왔을 뿐이라네. 슬픔에서 회피하려 하지 말게나 친우여, 인류는 누군가의 사랑을, 의지를, 진리를 이어받아 나아가야 하니까. 그리고 그걸 이끌 사람은-“
”나도 알아! 그렇지만ㅡ“
그만 얘기하라는 듯 성난 목소리로 힐데가르트는 소년의 말을 가로챘다.
허나, 자신을 바라보는 올곧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그래, 내가 졌어.”
하고 말하는 듯한 실소를 터트리고 만 것이었다.
이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
“뭐 좋아,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해 주지. 인류의 승리를 이 두 눈에 똑똑히 담아갈테니 늦게 온다고 뭐라하기 없기야 레온.”
두고 보라는 듯. 어쩌면 허세 섞인 말을 내뱉아놓고는 우습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안는다.
“응원하지.”
“응원할게요.”
’라나?‘
따스하고 정겹고 그리운 그 목소리를 향해 뒤도려는 찰나
툭 ㅡ
하는 둘의 손길에 밀쳐져 어두운 물 속으로 침잠하듯 깊숙이 내려간다.
이제는 이곳과는 작별이라는 듯 빛이 밝아온다.
“....허억!”
수면 위로 올라온 뒤 깊은 숨을 들이마쉬듯 잠에서 깬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비로소 자각한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총장님!”
“....수고했네.”
그녀의 차례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소리에 들이쉬었던 숨을 천천히 내쉰다.
’그래, 너희가 그랬듯이.‘
하며 먼저 떠난 자들의 한 마디를 회고한다.
총장은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따스한 별바다가 아닌 외로운 싸움을 위한 전장으로 나아갈 채비를 마친다.
약해빠진 생각은 모든 것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며
철의 여인 힐데가르트 베이르만은 각오를 다진다.
“그래, 혼자인 건 익숙해. 어디 한번 해 보자고.”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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