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개에 맞게 임의로 수정된 대사 & 언급만 된 캐릭터에 대한 날조 설정 존재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 목숨이 사그라지기 전에는 꼭 하고 싶은 일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일생을 되짚어보는 회고록을 적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고고학자로서 살아온 나에게 있어, 어떠한 기록으로 남겨지거나 혹은 어떠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고고학자로서의 레온 슈나이더는 그간 내가 써온 고고학 관련 논문만 정독을 하더라도 대충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여기에서까지 보는 이에 따라 시시한 고고학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뭐, 내가 보기에는 고고학은 이런 원고에서도 계속 나열해도 될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인 학문이다. 언제나 나에게 지적 호기심을 주는, 그래서 평생의 업으로 삼은 데 전혀 후회가 없는 그런 학문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고고학자로서의 레온 슈나이더는 그렇게 잘 정리된 논문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과를 유추할 수 있다는 소리다. 어떤 학문을 파고드는 학자에게 자신의 연구 실적을 남기는 길은 오로지 논문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나름 성실한 편이라 자잘한 연구 테마도 소논문으로 남기고는 했다.
하지만 레온 슈나이더는 이러이러한 고고학을 연구했다는 건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고고학을 연구하는 것 이외에서는 어떤 일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을 모를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초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사는 사람들조차도. 당연하다. 그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겪은 일들이며 그로 인해 겪는 감정 등을 오롯이 알 수가 없다. 반대로 나 또한 그들이 겪은 일들이며 감정 등을 대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나의 일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을 여기까지 본다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글을 남긴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고고학자보다는 한 명의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냐고. 어쩌면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나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나의 진실 된 열망은 그런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정할 필요가 있다. 나는 웬만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열망보다는 부끄럽게도 한 사람에게서만 오래도록, 그리고 아주 자세하게 기억되고 싶다. 그러니 지금 이 회고록 같은 것이 단 한 사람에게만 읽혀진다고 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이 글이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은 읽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만이 읽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걱정 말거라, 그에 대한 대비도 미리 다 준비해두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구나. 너는 이 원고를 다 보고 난 후 어떤 행동을 보일까. 이게 뭐냐면서 바로 파쇄기에 갈아 넣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아비는 정말 서운할 터이다. 그러니 그런 슬픈 선택은 하지 말도록 하렴.
너 혼자만이 보는 이 아비의 회고집이 되어도 괜찮을 듯 하지만, 네가 갑자기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이 퇴고도 못한 원고 그대로 출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공연연하게 나의 이 부끄러운 회고록을 보여준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을 듯 하구나.
……앞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후자의 상황이 실제로 닥쳐온다면 아마 나는 답지 않게 많이 부끄러울 것 같구나. 하지만 그래도 너는 분명 이 원고를 읽었다는 소리겠지. 나는 네가 이 글을 읽어준다는 것 자체에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기에 네가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서도 순전히 너의 몫으로 남기도록 하마, 주니어. 나는 분명 이 원고를 쓰기는 했다만 그에 대한 처분권은 오롯이 너한테 다 맡긴다는 소리란다. 하지만 분명 파쇄기에는 넣지 말았으면 한다. 퇴고도 못하고 시간에 쫓겨 급하게 쓴 글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나는 나름 열심히 썼단다.
아무튼 서두가 좀 길었구나. 사실 막상 쓰려고 하니 무엇부터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서 말이다. 조금 우습지 않으냐. 레온 슈나이더 한 사람의, 그것도 학술적인 업적은 제외한 전기(傳記) 같은 걸 쓰고 싶다고 본인이 먼저 언급했으면서 막상 시작할 방법도 모른다는 것이. 사실 조금 유감이 부분도 있단다. 고고학자로서의 이 아비에 대해 네가 관심이 훨씬 많았다면 난 아마 내가 쓴 논문의 초고를 너에게 전달하고 그것으로 끝이었을 거다. 하지만 넌 그렇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나는 너에게 있어서 그닥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의 학문적인 업적만을 나열한다고 한다면 네가 퍽이나 좋아할까? 끝까지 고고학만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나는 너의 기억 속에 정착되고 말겠지.
……사실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것부터 밝혀야겠구나.
주니어, 너는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 중 하나란다. 굳이 넘버링을 붙이자면 너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이겠지.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렴. 첫 번째는 언제나 변함없는 그 사람이니까.
그래, 네 엄마. 나의 아내, 라나 슈나이더.
그녀를 만나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꼈는지. 나는 실제로 내가 이런 수많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전율했단다.
왜냐하면 라나를 만나기 전의 나는 퍽이나 재미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란다. 고고학자로서는 주목받기 시작하는 신성(新星)이었을지는 몰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그런 인간. 어쩔 수 없단다. 나는 내가 관심이 가는 한 가지에만 온 열과 성을 다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나와 라나의 만남은 아주 우연히도 벌어졌단다.
역시, 너의 아버지로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나와 네 엄마가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 것 같구나.
여기까지 글을 읽은 볼프강의 입에서는 헛웃음처럼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게 뭐야…….”
물론 볼프강의 이러한 혼잣말을 듣고 대꾸할 만한 사람은 여기에 이젠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볼프강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 몇 십 장이 그 사람 대신인 마냥, 심히 떨리는 눈빛으로 해당 원고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고 나니 그 원고 안에서 익숙한, 이제는 그립기만 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말투, 이 글씨체. 전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아버지의 흔적이었다.
이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아버지의 흔적이 이런 종이 원고에서 발견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레온 슈나이더의 미발표 원고, 즉 유작(遺作)이 볼프강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은 결코 아주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모든 일들이 끝나자, 힐데가르트 베이르만 총장은 볼프강에게 어떤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두툼한 서류 봉투에 담긴 것이 어쩐지 대량의 종이뭉치일거 같았지만 볼프강은 예의상 질문을 했었다.
-이게 무엇이죠?
-레온이, 자네의 아버지가 자네에게 남긴 원고라네.
레온의 이름이 언급되자 볼프강은 무척 굳은 얼굴로 힐데가르트를 바라보았다. 굳어 있는 눈빛에서 일말의 희망을 본 힐데가르트는 서둘러 해당 원고에 대한 정보를 정정해주었다.
-생전의 교수가 써서 나에게 남겨둔 거야. 그래, 관측을 여러 번 하기 전의 교수가 말이야. 아마 교수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리고 만에 하나 자신의 존재가 없어질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자네의 앞으로 이걸 남긴 거겠지.
-……그걸 왜 지금 저한테 주시는 지 잘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볼프강의 저러한 의문 또한 대단히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교수의 유지(遺志)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이후에 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했거든.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주시는 건…… 좀 많이 늦은 감이 있어서 말이죠.
-미안하네. 서랍에 넣어두고 깜빡했어.
볼프강은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힐데가르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생각하기엔, 레온은 이미 힐데가르트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볼프강에게 이 서류 봉투를 넘겨줄 거라고 예상했을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 봉투를 어쨌든 볼프강에게 전달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레온 슈나이더가 힐데가르트에게 부탁을 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을 부분은 완수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이게 뭡니까?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레온이 절대 읽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서 말이야. 하지만 듣자하니 볼프강, 자네에게 아버지로서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적어놓았다더군.
-그게 원고지로 수 십 페이지라니…….
툴툴거리는 볼프강을 향해 힐데가르트는 아주 재치 있게 의욕을 북돋아주었다.
-그래서? 안 읽을 건가,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
-…….
그렇게 된 고로, 지금 이렇게 볼프강은 레온이 남긴 유작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글 쓰는 스타일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만 하나, 레온이 볼프강의 남긴 자신의 회고록은 심히 신선한 내용들이 많았다.
특히 아무리 글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는 아버지라니. 심지어 자신과 볼프강의 어머니의 연애 시절 이야기부터 할 거라니. 어머니의 임종을 어린 아들 혼자 지켜보게 한 죄명이 있어 살아생전 레온 슈나이더와 볼프강 슈나이더 사이에서는 라나 슈나이더라는 주제 자체는 암묵적으로 금지되었었는데 말이다.
아, 아니지. 볼프강은 곧바로 자신의 이런 편협한 생각을 정정했다. 라나 슈나이더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던 레온 슈나이더를 볼프강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도 좀 특수한 경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어머니를 언급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좀 신선한 충격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설마 했는데 그럴 줄이야…….’
사실 볼프강이 가장 감탄한 부분은 끝까지 고고학자 같았던 자신의 아버지의 행보였다. 원고 첫 말머리에서부터 그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기록으로 남겨지거나 기록을 남기거나. 이것이 무척 중대 사항이라는 것은 나의 직업으로 인해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는 둥. 이것만 보면 볼프강이 평소 기억하고 있는 고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높은 자신의 아버지가 쓴 글이 100% 맞았다.
이걸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남겼다는 것에서 볼프강은 더는 태클을 걸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레온은 미리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육체의 역사를 받친다고 해도 기억의 역사를 희생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꼭 나중에라도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그 기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둔 것일 터. 말로써 전달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좋았을 테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았을 터.
그러니 여기서는 아주 예의바르게 그가 쓴 ‘그 기록’을 읽어내는 수밖에. 부모님의 연애 시절 에피소드라니……. 어디서 생생하게 들을 경험이 없는 것이기는 했다. 사실 남의 연애 썰을 듣는다는 느낌의 흥미 요소보다는 궁금증이 더욱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 시절의, 그러니까 볼프강이 태어나기 전의 레온과 라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볼프강은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서 다음 문단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운명(運命).
주니어, 너는 운명을 믿니?
나는 운명이라는 걸 처음부터 믿지 않았단다. 우연한 발견으로 세기의 길이길이 기록될만한 업적을 세울 수도 있는 학문에 종사하는 자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기록이 적힌 서적이든, 몇 천 년 전에 만들어진 유적이든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을 법하잖니? 그걸 그냥 노력이 부족해서 찾지 못한 거라고 젊을 적의 나는 그렇게 치부했단다.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나 오만했다는 소리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은 있기는 한 것 같구나.
정확히는 거스를 수 있는 운명과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그렇게 굳이 구분하자고 한다면, 라나는 나에게 있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레온 슈나이더라고 하는 인간의 본격적인 시작점을 말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녀와 처음 만났던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안녕하세요.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나를 향한 인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적당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있자니 다시 한 번 그 목소리가 나에게 인사하였다. 그제야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 정면을 바라보니 양산을 쓴 여자 하나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 기억에는 없는 얼굴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향해 이렇게 질문했다.
-저를 아시나요?
-아니요.
-그럼 어디선가 저를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어떤 외형의 여자가 나한테 저런 말을 했는지는 굳이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으마. 네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너 또한 아주 잘 알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참으로 당돌하지 않니, 주니어? 그것이 라나와의 첫 만남이었단다. 늘 습관마냥 가는 공원에 앉아 독서를 즐기고 있을 때 아주 우연히 인사를 건넨 생전 처음 보는 여자. 그리고 그것이 라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기도 했다.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끝나자, 이번에는 여자가 나에게 질문을 해댔다.
-혹시 시간 있으세요?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와 점심 식사 가능하실까요?
나는 그때 당시 항상 점심쯤에 그 공원에 가서 독서를 하다가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걸로 점심을 때우고는 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날도 간단한 점심으로 먹을 만한 샌드위치가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 낯선 여자와 같이 하는 점심 식사를 거절해도 되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당혹스러운 제안이군요.
-손해 보시는 제안은 아니실 거예요, 슈나이더 씨.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싶다가 옆에 놓인 가방에 슈나이더라고 적힌 네임택이 있었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말았단다.
내가 적잖이 당황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여자는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저만 슈나이더 씨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부당하겠죠? 전 라나라고 해요.
갑작스러운 통성명을 나누고 나니 나는 당연히 드는 의문을 눈앞의 여자에게 했다.
-라나 씨, 질문이 있습니다. 방금 전 절 처음 봤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라나 씨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대뜸 점심 약속을 잡으시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여자는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친구와 같이 먹기로 한 점심 약속이었는데, 친구가 급한 환자가 들어왔다고 해서 그만 약속이 파토가 나버린 거예요.
-오, 저런.
-하지만 이미 음식 값은 지불되고, 그에 맞게 2인용 식사는 준비가 되어버린 거죠. 애써 준비된 음식 하나를 버리는 건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저 말고 라나 씨의 다른 지인을 부르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닙니까? 저는 라나 씨에게 있어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일 뿐이니까요.
내 의견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다시 말을 정정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사실 슈나이더 씨를 오늘 처음 봤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네?
-저는 꽤 자주 이 공원으로 산책을 나온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시간쯤에 여기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시는 슈나이더 씨를 본 적도 적지 않아요.
-편면식 관계라는 거군요. 그렇다고 라나 씨가 저와 점심을 해도 된다는 것에는 여전히 설득력이 없습니다.
-꽤 고집스러우신 분이시네요.
여자는 또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든 잘 웃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그녀는 나한테 있어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로네펠트, 좋아하시나요?
먹을 것으로 꼬셔진 남자라고는 하지 말아주렴. 주니어, 너 그런 생각을 분명 했겠지?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녀, 라나에게 관심이 그때쯤에도 있었단다. 사실 꽤나 인상적인 인상이지 않니. 대뜸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대범함이,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바로 점심 약속을 잡는 그 진행력이며.
라나와의 점심은 무척이나 즐거웠단다. 그녀는 말이 잘 통하는 여자였거든. 대부분의 지식이 고고학인 나와 달리 그녀는 식사하는 내내 문학 이야기를 즐겨했단다. 그리고 실로 같이 먹었던 점심 코스는 훌륭하기 그지없기도 했고. 라나의 말대로 내가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점심 식사 자리였단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에서 헤어질 때, 나는 그녀에게 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단다. 무척이나 훌륭한 점심 식사였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나중에 보답을 남기고 싶어서 준 번호였단다.
라나는 그 쪽지의 정체를 알자 빵 터졌단다. 번호를 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꼭 보답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도 했단다. 먼저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린 건 자신이고, 내가 그 고집에 어울려준 거라면서.
그러면서 그녀는 헤어지면서 나에게 이렇게 인사했단다.
-그럼 우리 또 봐요.
그래, 그 날 이후로 그 공원이 이제는 만남의 장소가 되어버렸단다. 내가 언제나와 같이 특정 벤치에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든 리포트를 쓰고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자연스럽게 라나가 다가와 내 옆에 앉고는 했다. 그러면서 그녀도 작은 수첩을 꺼내면서 시 한 구를 적곤 했단다. 그도 아니면 계속 내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든지. 그러다 둘이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찌나 어색하던지.
첫 인사는 항상 그녀가 먼저 나에게 했단다. 나는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주변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그런 횟수가 쌓이고 쌓이니 이런 나라도 그녀가 올 때쯤에는 자연스럽게 한 번은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지경이 되더구나. 처음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날을 잊지 못하겠구나. 먼저 인사를 건넨 나를 보며 그녀의 눈이 아주 커다래졌단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 싱그러운 녹음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 마음은 술렁거려질 수밖에 없어졌단다.
처음에는 그 술렁임의 정체를 미처 알지 못했단다. 그저 급성 체기가 올라왔다고 늘 대충 생각할 뿐이었지.
어느 날은 하도 이 술렁임을 참다못해 라나의 앞에서 실토하기도 했단다. 그걸 가만히 듣던 라나는 그저 아무 말 하지 않고 웃어줄 뿐이었단다.
주니어, 너도 알겠지? 라나는, 너의 엄마의 웃는 얼굴은 마치 따사로운 봄의 햇살과도 같다는 것을. 너의 엄마의 녹색 눈동자는 마치 한여름의 울창한 숲처럼 싱그럽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퍽이나 사랑했단다.
-문득 느끼는데 라나는 잘 웃는군요.
-그런가요?
-네, 당신은 웃는 얼굴이 잘 어울려요.
-그 말, 기쁘네요.
그녀는 눈매를 가늘게 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단다.
-레온, 나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라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레온, 나 당신을 좋아해요.
나는 바로 이렇게 대꾸했단다.
-그거,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네요.
부끄럽게도 그때까지의 나는 내가 라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단다. 그저 특별히 아껴주고 싶고, 말도 잘 통하고 집안도 적당한…… 결혼 상대. 이런, 글로 적었을 뿐인데도 많이 부끄러운 사실이구나. 또 한 가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라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단다.
그런데도 라나는 그저 웃어줄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럼에도 직접 입으로 전해주는 것이 가장 나을 판단이건만.
그러니까 여기서는 한 가지 잔소리를 하마.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렴.
“어이, 아버지, 이런 데서까지 잔소리냐고…….”
볼프강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짧게 푸념을 했다. 정말 읽으면 읽어내려 갈수록, 이건 출판을 위해 쓴 원고가 절대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읽는 사람을 아주 특정지어 놓고서 이렇게까지 쓸 일이 없을 테니까. 중간 중간 볼프강을 향해 인생의 선배 느낌으로 잔소리 및 충고를 적어내린 것을 보다보니 볼프강은 흡사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그 레온 슈나이더’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까지 읽은 볼프강의,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감상평은 딱 하나. 아버지, 당신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무 많이 늦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 종류의 잔소리를 글을 적어가면서 여기에서까지 한다는 건……. 그것이 레온 슈나이더에게 있어서 라나 슈나이더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큰 후회로 자리매김한다는 소리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지금 자신이 원고를 읽는 중간마다 마시고 떫은 홍차처럼 씁쓸하기만 하였다.
그러면서 찬찬히 자신의 행적도 저절로 되짚어보게 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볼프강은 자주 해주었던가? 놀랍게도 아니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결코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어도 제대로 된 이해조차 못했을 거라고 치더라도, 아버지의 경우는……. 오해가 있었으니까.
볼프강은 지금의 자신 또한 레온을 탓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 웃음이 비죽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참 글을 잘 쓴단 말이야…….”
새삼 이런 것에서 또 감탄을 하는 것은 그저 딱딱한 활자를 통해서만 볼프강에게 전달하고 있을 뿐인데도, 볼프강의 감정을 시시각각 변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감탄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니 아주 좋은 논문의 예시로 번번이 아버지 직장 동료들에게 언급이 되었던 건가 싶었다. 이해하기 쉽고, 적당한 재미도 있는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게 하물며 지루할 것이 고정관념으로 잡혀있는 논문이라면 더 높이 평가가 될 터였다.
볼프강은 하얀색과 검은색밖에 없는 활자들의 대장정 속에서 문득 피로를 느껴,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김에 볼프강은 애써 잊고자 했던 자신의 어머니와의 추억을 오랜만에 떠올려 보았다.
레온의 라나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주 웃는다는 표현이었는데, 그 말 그대로 볼프강의 기억 속에 있는 라나 또한 볼프강을 향해 자주 웃어주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며 볼프강 또한 옅게 웃어보였다. 항상 자신을 향해 따스하게 웃어주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볼프강도 덩달아 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눈의 피로를 덜어내고 나서 볼프강은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와 라나의 삶은 크게 변한 부분은 없었다. 단지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공원의 벤치에서 우리들의 집 안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나는 훨씬 큰 안도를 느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녀는 크든 작든 앓고는 했으니까. 그래서 공원에서 지속적으로 만날 때에도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되면 꼭 그로부터 한 달 후쯤에 나타나고는 했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그녀의 건강 상태에 대해 나쁜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깥에서 만나는 걸 굳이 고집한 이유는 그녀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집안에만 있는 건 많이 답답해요.
그렇게 크게 앓고 나서 나타날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했었다. 꼭 나오고 싶었지만 몸이 영 따라주지 않았다면서 말이다.
그걸 여러 차례 겪고 나니 이럴 바에는 같이 사는 것이 좋을 거라는 말을 꺼낸 것은, 충동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단다.
신혼집은 공기가 상대적으로 좋은 교외로 택했다. 그리고 정원이 되도록 큰 저택으로. 그래야 네 엄마가 혹여 갑갑할 때 가볍게라도 바람을 쐴 수 있는 그런 저택으로. 다행히 라나는 그 집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커다란 저택에서 몇 년을 둘이서만 살아왔다. 아이를 가진다는 생각 자체는 꿈에도 하지 못했단다. 아내의 건강 문제도 있거니와, 나는 애초에 내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린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같이 살고 싶다는 마음만 존재했다는 것이 참으로 웃긴 지점이기는 하구나.
하지만 그녀가 먼저 몇 번 물어본 적은 있었단다. 우리, 아이 가지지 않을래요? 그럴 때마다 나는 회피하거나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못했다. 라나도 딱히 날 독촉하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곤 했다.
그렇지만 주니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란다.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 한단다.
특히 그 ‘기적’이 사랑과 아주 유서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말이지.
-아들이래요.
의사 친구에게 정기적인 검진을 받고 온 어느 날, 라나는 무척 밝은 표정으로 이와 같이 말했다.
-힐다가 애 아빠를 쏙 빼닮았을 거라네요.
-레온?
갑자기 나의 이름을 부르는 라나의 목소리에 나는 불현듯 나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단다.
그래, 나는 기쁜 것과 동시에 하나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로 인해 불안감도 같이 느꼈단다. 게다가 라나의 몸에 대한 걱정도 한 무더기였지.
-아, 미안……. 좀 생각에 잠기느라.
-내가 많이 놀래켰나보네요.
-그게 아니라……. 아니, 맞아. 많이 놀란 건 사실이야.
-그럴 것도 같았어요. 우리, 이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잖아요.
담담해 보이는 라나에게 나는 이제까지는 미처 말하지는 못하던 내 진심을 털어놓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단다.
-라나, 솔직히 말하지.
-나는…… 두렵기만 해.
-무엇이 말이에요?
-당신의 몸 상태가 그닥 좋지 않…….
앞서 라나가 아이를 가지자는 말을 할 때마다 회피를 한다고 했었지. 주로 어떤 식이었냐면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라나의 좋지 못한 몸 상태를 가장 큰 염두에 두면서 피하고 다녔단다.
하지만 그쯤 되니 그 알량한 핑계마저도 라나에게는 통하지 않더구나.
-그건 내가 힘내볼게요.
-……힘낸다고 될 문제가 아닌 걸 알잖아, 당신도.
-그래도 힘내보고 싶은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요?
아마 그때쯤부터 라나는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한 듯 했다. 아니, 이 말을 꺼내기 훨씬 오래 전부터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꺼내지도 않았던 나의 불안을 콕 집어내서 이와 같이 위로를 건넸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 한결같은 상냥함에 나는 어쩐지 반항을 하고 싶어지더구나.
분에 넘치게도.
-못하면……?
-못할 리가요.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줄게요. 그러니 나도 좋은 엄마가 되는 거 레온도 많이 도와줘야 해요?
-……당신은 잘 해낼 거야. 오히려 걱정은 나 혼자만이 해야지.
이에 라나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그럴 리가.’ 라는 말이었을 테지.
만약 그에 대해 내가 거기서 더 대꾸했더라면 아마 이 사건은 레온 슈나이더가 평생에 걸쳐 후회할 만한 목록 리스트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라나가 적절하게 화제를 돌려주어서 그런지, 그런 만약에는 그저 실없는 가정만이 되었다는 게 다행이구나.
-그러고 보니 힐다가 물어보더라고요.
이미 그렇게 말하는 라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아이 이름은 무엇으로 할 거야? 라고.
-아이…… 이름?
-네. 혹시 당신이 따로 생각해둔 거 있나요?
-……없어.
새삼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정말 없었단다. 누누이 말하기는 했지만 그런 상상을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어야지.
-아들이라고 한다면 레온 슈나이더 2세, 아니면 레온 슈나이더 주니어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또 하나 고백을 할 차례구나. 동료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악명이 높지만 나는 그냥 애초에 작명 센스가 바닥을 치는 편이란다. 직관적이고 알기 쉬운 단어로 짓는 걸 선호한다는 소리지.
하지만 저때의 나에게 있어서 저건 나름 고심하여 만든 이름이었단다. 난 나에게서 무언가가 비롯되어 어떠한 존재가 탄생하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놀랍고 경외까지 하고 있었으니.
그러다 보니 널 그런 의미를 담아 ‘주니어’라고 계속 부르게 되더구나. 뭐, 너는 그 소리를 정말로 싫어했지만.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단다.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라나와 함께 고심(?)하며 너의 이름을 짓던 시절로 자꾸만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무척 힘겨운 일이었단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나의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는 하다만, 나의 처참한 작명 센스마저 사랑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더구나. 내가 이런 대답을 하니 곧바로 고개를 젓는 것을 본다면 말이다.
-그렇게 지으면 아이가 자라면서 혼란스러워할 지도 몰라요.
하지만 매우 타당한 의견을 나에게 주장했단다.
-이왕이면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야무지게 자신의 취향 또한 피력했단다.
그 단호함과 패기에 압도당하여, 결국 네 이름을 짓는 건 온전히 너의 엄마의 몫이 되었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이름 짓는 센스가 처참하다는 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네 엄마가 어떤 이름을 골랐을지는 대충 짐작은 가겠지.
-볼프강 슈나이더.
라나가 좋아하던 대문호의 미들네임을 따서 네 이름을 지었단다.
-애칭으로 볼프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름이기도 하고요.
라나는 몇 번이고 너의 이름을 읊조리며 아주 기뻐했단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래……?
-당신 마음에도 드나요?
-나는…….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때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가장 옳았을지는 모르겠더구나.
-당신이 좋다면야.
-그게 뭐에요.
하지만 그렇게 대꾸하는 라나는 분명히 웃고 있었으니, 그건 그거대로 괜찮았던 것일 테지.
-이제 오는 건가, 교수?
-그 호칭은 가급적 불러주지 않았으면 하는데, 힐다.
-교수를 교수라고 부르지, 그럼 무엇으로 부르겠나?
-라나는?
힐다…… 유니온의 현(現) 총장과 이런 악담을 나눈다는 것에 신기할 테지. 나와 힐다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단다. 정확히는 라나와 결혼하게 되면서 라나의 친우였던 그녀와 나도 친우 사이가 된 것이란다. 의사인 힐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많은 고마움을 느꼈는지 모른다.
-저기, 복도 안쪽 개인 병실이야.
바로 라나를 찾는 나를 향해 힐다는 가볍게 혀를 찼지만, 내가 못 찾을 것도 대비해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한 병실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단다.
-고맙군.
-어서 라나한테 가기나 하라고.
그녀의 옆을 지나쳐 가려는데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물어보았단다.
-라나는 괜찮은 건가?
-내가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가서 보는 게 더 좋을 거야.
그리고 보통 힐다가 그런 말을 할 때에는 힐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게 좋기 때문에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병실 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침대에 라나가 누워 있었단다. 아직은 좀 쌀쌀한 초봄 날씨임에도 병실 내 환기를 위해서였는지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단다. 라나에게 행여 감기라도 들까봐 나는 침대를 지나쳐 열려져 있던 창문을 닫고서 네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로 시선을 돌렸단다.
-라나……?
그리고 병실 침대에 누워 창백한 낯으로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너의 엄마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단다.
부부이기에 같은 침대에서 자는 나날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나는 라나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라나는 몸이 약해 아픈 적도 많아 내가 간호하기 위해 라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죽음’과 가까운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겁부터 나 불러서 깨울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졌단다.
뺨을 톡 건드리자 감겨있던 라나의 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녹안이 나를 향하자 초승달마냥 눈썹이 호선을 예쁘게 그렸다.
-……왔어요?
-미안, 일이 늦게 끝나서 늦고 말았군.
-걱정했었어요.
라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웃어주었지만 그 미소는 무척 힘겨워 보였단다. 아무래도 출산의 여파가 적잖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아기 봤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라나는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병실 침대에 옆에 있던 아기 침대에서 무언가를 꺼냈단다. 그 안에서 나온 건 강보에 쌓인 덩어리였는데, 천을 걷어내자 네 얼굴이 뿅 하고 나타났단다.
-귀엽죠?
-볼프야, 우리 아가…….
솔직히 말하자면 귀엽다, 혹은 감동이 가슴 끝에서부터 피어오른다는 것보다는 나는 순도 100%로 신기했단다. 당시 내 입장에서는 갑자기 너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생기게 된 것이니. 물론 내가 곧 아빠가 된다는 건 라나든 힐다든 누누이 말했고,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이론을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항상 다른 것이니까, 그것에 대한 괴리감을 좀 느끼고 있었단다.
너를 소중히 안아주면서 라나가 말했다.
-힐다의 말대로 정말 당신을 닮았네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군.
-정말 그렇다니까요.
그러면서 너를 내 쪽으로 넘기며 제안하길,
-당신도 안아볼래요?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거라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라나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 결국에는 너를 안아주었단다. 이렇게 안는 것이 맞냐며 어설프게 너를 들고 있는 모습에 라나는 웃음보를 터트렸단다. 그렇게 처음 내 품에 안겨진 너는 라나가 안아줄 때랑 달리 불편한지 인상 같은 걸 찌푸리며 눈을 떴단다. 너의 옅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라나는 기뻐했고, 나는 나와 같은 눈동자색이라서 라나가 나를 닮았다고 한 걸 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단다.
너를 행여 떨어뜨릴 것 같다는 핑계로 다시 라나에게 건넸을 때, 라나는 대충 이런 나의 낌새를 눈치 챈 듯 보였단다. 주니어, 너도 알겠지? 너의 엄마는, 나의 아내는 눈치가 무척이나 빠른 사람이라는 것을. 다만 그렇게 자신이 알아챈 것을 섣불리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 너한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라나는 그런 사람이었단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를 가졌다고 고백했을 때처럼 나에게 의미심장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었을 터이니.
-여보……무슨 일이 있어도 볼프를, 우리 아들을 지켜줘야 해요.
-……알았죠?
생각해보면 라나는 불안했던 거야. 그래서 아이를 낳아 기쁜 분위기에 답지 않게 그런 부탁을 한 걸 거야. 아니면 잠깐 깜빡 잠이라도 들었을 때 예지몽이라도 꿨을지도 모르지.
혹은 둘 다이거나.
아, 대답은 했냐고? 대답은 당연히 할 거라고 했단다.
-당신이 그렇다면야…….
-꼭 그래야 해요. 약속이에요? 저랑 약속한 거예요?
-약속하지.
……어울리지 않는 잠깐의 사족이긴 하다만, 이리 서술하자니 난 시작부터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 같구나. 1년에 가까운 수개월이라는 준비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때에는 아직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는 듯이 너를 그저 평면적으로만 대했으니까. 그 후로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면 그것조차도 아니지.
주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 말을 지금 꺼내는 건 시기상조로 보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지금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꼭 해주마.
“…….”
쉼 없이 읽어 내리던 도중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보기도 했던, 익숙한 내용에 볼프강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 문장 하나로 인해 볼프강은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을 그만 생경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볼프강의 어머니, 자신의 아내에 대한 기억을 전부 받쳤노라고. 그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투로 담담하게 아무 것도 기억나지를 않는다고 고백하던, 자신보다 훨씬 키가 작았던 아버지의 모습.
그 괴리감은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자신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그래도 그때 레온 슈나이더에게 직접 들었을 때보단 여기 종이에 더 자세하게 적혀 있기는 했었다. 하긴, 듣자하니 라나 슈나이더에 대한 기억을 받쳤다고 하기 전에 쓴 글이니까, 여기엔 그래도 그때 레온에게서 직접 입으로 들었을 때보단 더 상세하게 적혀있긴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볼프강은 급(急) 체한 것 같이 속이 메슥거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볼프강은 레온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던, 그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레온은 갓 태어난 볼프강에게 상당한 낯을 가리고, 경계심이 강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그저 표현이 서툴렀을 뿐인 아버지와 이 글 속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교하자니 당연히 기시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느끼는 울렁거림이었다.
“아버지가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
그러니 그 기시감을 상정하고 생각한다면…….
아마 레온 슈나이더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미안하구나, 주니어.
그리고 이건 볼프강이 아직까지는 레온 슈나이더 본인이었던 시절에, 레온에게서 직접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신기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말을 하겠다고는 서술했는데, 만약 정말로 레온이 볼프강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 맞다고 한다면…….
정말 레온 슈나이더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하겠다’는 그 말을 지킨 것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보니 정말 레온 슈나이더는 레온 슈나이더구나, 한결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한 약속은 항상 지킨 사람이었다.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지 간에, 무조건적으로.
-볼프가 당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느 날, 라나는 나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그럴 리가.
그리고 나는 그걸 가볍게 부정했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 떠올랐던 풍경은 고고학 연구를 위해 몇 달 만에 돌아온 나를, 문 너머에 숨어서 지켜보던 너의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니에요. 아버지는 언제 돌아 오냐는 질문을 저에게 매일 같이 했는걸요?
-그냥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어본 걸 수도 있잖아.
-그리고 당신이 돌아오면 같이 마시고 싶다고 홍차 마시는 연습도 했는걸요?
라나의 그 설명에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렸단다. 굉장히 긴장한 표정으로 내 취향대로 탄, 어린이가 마시기에는 떫을 것이 분명한 홍차를 애써 마시던 네 모습이 말이다. 내 예상이 맞았다는 듯 넌 내가 등을 뒤돌자마자 ‘윽’ 이라며 바로 맛없다는 의사를 표현했었지. 내가 다시 너를 보니 너는 아닌 척 휘파람을 불더구나. 그러다가 절반쯤 마셨을 때, 도저히 못 마시겠다는 듯 잔뜩 울상인 너에게 슬쩍 우유를 건네주니 화색이 돌았던 것까지.
밀크티를 맛있게 마시던 너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단다.
-그래서 억지로 나랑 같은 홍차를 마신 거군.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결국 실패했다면서 저한테 잔뜩 울상을 짓더라고요.
-책망하진 않았어. 그리고 당신한테 들어서 나도 주니어가 단 것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제가 매주 보내던 편지에 썼던 걸 다 기억하고 있었네요. 라나는 무척 기쁜 것처럼 보였단다.
-이렇게 보면 당신도 참 서투른 사람이란 말이죠. 좀 더 표현을 해도 좋을 텐데.
-재미없는 사람인 것뿐이야.
-왜 그렇게 자신을 박하게 대하고 그래요.
-라나, 난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한 것뿐이라고.
그러다 보니 그날이 아니면 도저히 이 질문을 다시는 하지 못할 것 같더구나.
-그래서 가끔은 궁금해.
-뭐가 말이에요?
-왜, 그날 당신이 나한테 인사를 했는지.
그날, 그런 이상한 접점이 없었으면 난 이렇게 라나를 내 아내로, 주니어 너를 내 아들로 맞이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나의 질문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라나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단다.
-나는 당신이 볼프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할 줄 알았어요.
-학자로서 그것도 궁금하지만, 난 지금 내가 물어본 게 더 궁금하니 그 질문은 다음에 하도록 하지.
-후후후……. 그거, 나중에 저한테 말고 볼프한테 직접 물어봐야 해요, 알았죠?
라나는 그런 이상한 당부를 남기더니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기 시작했단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하면, 당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겠지요?
-……부정은 못하겠군.
-그런데 정말로 그랬어요. 그날 벤치에 앉아있던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어요.
라나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단다.
-운명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운명이라…….
이 당시의 나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을, 앞서서도 언급하기는 했지만 기억이 안 날수도 있으니 재차 설명하자면,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단다.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운명신봉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도 그럴게, 주변에서 하나같이 전 오래 못 살 거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나 또한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고 체념하면서 살기도 했고요.
그렇게 언제쯤 이 삶이 끝날까…… 라며 무료하게 살던 도중에 당신을 만난 거예요. 라나는 마치 내가 라나에게 있어서 ‘기적’이었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건 우리 아들…… 볼프를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았어요.
라나는 마지막으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끝냈단다.
-그래서 그저 지금은 당신과 볼프와 함께 살고 싶어요.
라나와 내가 만나게 된 것도. 라나와 나의 사이에서 주니어 네가 태어난 것도. 라나와 네 덕택에 재미없기만 하던 남자가 점차 변화해가는 것도.
그것들이 전부 라나가 말한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럼 라나가…… 나의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서 하루하루 죽어갔던 것도 그 연장선인 걸까?
주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나는 절대 인정할 수가 없었단다.
항암치료를 하면 완치할 수도 있다는 담당 주치의의 말은 그저 형식적인 위로로만 들렸단다. 라나와 같이 병실에서 나오고서 나는 한동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단다.
그 이후의 며칠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른다. 라나는 평소랑 다름없는 생활을 지속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단다. 그러던 중, 책상에 수북이 쌓여있는 우편물을 기계적으로 정리하다가 힐다에게서 온 그 편지가 눈에 띄었단다.
그 시점의 힐다는 유니온의 부총장이었지.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딴 힐데가르트 기관에서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들, 즉 차원종과 그와 관련된 오파츠를 연구하고 있었지.
차원전쟁 이후, 세계 각지에서 우리 인류의 것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유적지가 발견되어 그쪽 종사자인 나에게 몇 번의 의뢰가 오기도 했었던 시기였지.
그러니 이번에도 또 그런 내용일 것이 뻔하지 않았겠니.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었단다. 아무리 이런 나라도 지금 이 시기에는 힘들어할 아내의 옆에 있어주는 게, 옳은 일이라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힐다의 편지에 있었던 내용은 ‘군주’에 관련된 이야기였단다. ‘군주’라고 하는 개념은 추측성이기는 하다만, 여러 오파츠를 통해 그 시기에도 존재는 한다고 극소수의 인류가 인식 정도는 할 수 있었던 때란다. 애초에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나이기도 했지. 힐데가르트 기관에 협력하는 고고학자 혹은 그 분야와 관련된 전문가는 나 말고도 여러 명이 더 있었지. 세계 각지의 석박사들이 은밀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단다.
그래서 군주라고 함은 불사의 존재이며 이를 연구하면 인류 또한 군주에 준하는 위치로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외부차원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유적지를 답사해달라는 부탁이 써져 있던 의뢰서였단다.
군주, 불사의 존재. 그 단어들이 며칠 동안 혼탁하기만 하던 내 머리를 단박에 맑게 해주었단다.
그리고 동시에 라나의 그 말이 떠올랐단다. 그래서 바로 서재에서 바로 뛰쳐나와 어린 널 재우고 있던 라나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단다.
라나,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지?
그저 지금은 살아보고 싶다는 그 말.
주니어, 라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 것 같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조용히 웃어줄 뿐이었단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단다.
볼프강은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뒤의 일은 볼프강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결국 레온은 자신의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여 불사의 존재인 군주에 대해 지나치게 몰입을 하였다. 그로 인해 자신의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최악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홀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던 볼프강은 그저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였다.
사실 볼프강이 레온에게 실망했던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초췌한 몰골로 아버지는 겨우 볼프강의 앞에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서운한 부분도 있었지만 사실 어리기만 했던 볼프강은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그러나 레온은 자신을 현관 앞까지 마중 나온 볼프강을 그대로 지나칠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의 아내의 죽음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회피지. 볼프강은 혀를 가볍게 찼다. 자신의 그러한 행동들은 그저 도망쳤을 뿐이었다고, 본인에게도 인정받은 바였다.
이에 대해 레온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명시해두었다.
나는 몹시도 두려웠노라고.
……나는 몹시도 두려웠단다, 주니어. 라나가 없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자신이 말이다. 나와 너를 향해 화사하게 웃어주던 라나의 그 얼굴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다시는 그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물론 내가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나의 삶에 있어서 라나와 있었던 삶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점점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지겠지. 라나와 만나기 전의 나였다면, 나는 덤덤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네가 잘 알고 있겠지, 주니어?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최악의 아비가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절망만 하고 있던 나의 눈에는 살아있는 네가 아닌, 죽은 라나만이 온 시야를 차지하고 있었구나.
라나는 이렇게 말했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면, 그건 그 나름의 운명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라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주니어 너와 같이 살고 싶다고도 했었다.
나는 그러한 라나의 소망을 들어주고 싶었단다. 그러면서 덤으로 이겨낼 수 있는 운명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물론 나는 그걸 라나에게 해내주지 못했지.
이런 나 자신이 너무도 혐오스러워서, 마주보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기만 했었다. 정도가 심할 때는 나는 비관론적인 운명신봉자가 되기도 했었을 정도니까.
어째서 나와 라나는 그 장소, 거기에서 만났던 걸까, 로 시작하는 질문의 끝은 언제나 이런 공허함을 맛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냐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 결론의 또 다른 이름은 내가 그녀를 생각보다 많이,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지. 그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단다.
그래서 끝까지 도망치려고만 했었단다. 그에 대한 화룡점정은 미국에 있는 대학에 교수직을 제의받아, 너에게 나와 같이 독일을 떠나자고 했을 때겠지.
너는 굉장히 반항심이 강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
-당신이, 당신이 뭐길래 여기를 감히 나보고 떠나라고 하는 거야?!
그래, 이 집이 어떤 장소인지는 나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
나와 라나, 그리고 우리의 아들이 시작된 장소. 그렇기에 머무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라나를 그리워하게 되고, 라나를 아직까지도 떠나보내지 못한 나에 대한 혐오만 올라오는 장소. 애초에 너에게 그런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이미 유적지를 봐야한다는 핑계로 몇 달씩이나 집을 비우던 사람이 말이다.
그래서 결국 미국으로 가는 건 나 혼자였지. 그리고 혼자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하던 중 스스럼없이 깨닫고 말았단다.
주니어, 너는 나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이구나, 라고.
나는 그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홀로 견뎌야 내는 그 상황이 너무도 무서워서 도망치기만 했는데.
너는 어떻게든 마주보려고 했었다는 것이. 그만큼 너에게 라나는 좋은 어머니였던 것이 분명하지.
그랬기에 나는 내가 힘들더라도 끝까지 너의 곁에서 같이 죽은 네 엄마를 추억하는 행동을 했었어야 했는데.
이미, 이런 후회는 진즉에 늦어버린 거지. 너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것이 언제인지 이제는 희미하기만 하구나. 네가 클로저가 되었다는 소식도 네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힐다의 관련자를 통해 건너 소식으로 들은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네가 일명 <검은책>의 사서가 되었다는 것도 들었고 말이야.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라나가 죽었을 때와 비슷한 허망함을 느꼈단다.
나는 계속 힐데가르트 기관에 협조를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네가 <검은책>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한탄했지. 나에게 있어서 운명이란 이렇게 잔혹하기 그지없는지 모르겠다고. 그래도 이 세상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피붙이 한 명이 남아있다는 사실로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던 나에게, 너의 72번째의 사서로서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는 가늠하지 못할 테지.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든 설명을 하고 싶어도 사실 잘 하지 못 하겠구나. 만약 그걸 내가 잘 했더라면 너와 나의 사이가 지금보다는 그런대로 원만했을 테니까.
……이상한 추론만을 계속해서 하게 되는구나. 그만큼 난 그런 지나간 나의 행적들이 무척이나 후회스럽다는 것일 테지. 하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는 그 후회하는 시간을 다시 되감을 수는 없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모든 이들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너만은 <검은책>에서 해방시켜주고자 다짐을 하였다.
솔직한 고백을 하나 하자면, 이러한 결심이 선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단다. 라나 때에는 중간쯤부터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끝까지 회피만을 했었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사무치도록 후회되는지 모르겠더구나.
그래서 결심을 하였단다. 적어도 너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보자고. <검은책>에서 벗어날 방법은 찾지 못하더라도, 네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되는 것만은 막겠노라고.
그렇게 무언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라나 때처럼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다니던 도중, 힐다에게 연락이 하나 왔다.
고비 사막에 이제껏 본적이 없던 새로운 이차원 유적지가 나타났다고.
주니어, 다시 한 번 물어보마. 너는 운명을 믿니……?
다시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운명을 믿는단다. 라나의 죽음, 그리고 <검은책>의 사서가 된 너를 보았을 때는 지독할 정도로 비관적인 운명신봉자였었지.
인간은 운명에 휘둘리며 살 수 밖에 없다고 보았지.
이런 내가 그래도 너를 어떻게든 구할 방법을 찾고자 마음을 다잡은 건 내 안에 있던 라나, 네 엄마와 했던 약속 때문이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니어, 너를 지켜달라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라나의 그런 부탁이 없었어도 너를 살리고자 온 세계의 유적지들을 다 뒤졌을 것 같구나.
라나의 말이 옳았어.
난 주니어, 널 사랑한단다.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단지 내가 지독할 정도로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뿐이었지. 그저 그랬을 뿐인데 나는 내가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없는 인간이라고 이제까지 착각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구나. 이 사실만 봐도 라나는 나보다도 훨씬 더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단 소리겠지.
이야기가 좀 다른 길로 샜구나. 마저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고비 사막에서 나타난 새로운 유적지 이야기부터 다시.
조사를 통해 난 그 유적지가 바알이 만든 도서관이라는 것을 알았단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열을 느꼈지만 아쉽게도 서적 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단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다가 혹여 책 한 권이라도 발견할까 싶어 다시 도서관 내부를 살피던 중 난 무척 특이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단다.
그것은 바로 낡은 축음기였다.
그리고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그 축음기의 태엽을 감았을 때.
나는 비로소 한 줄기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단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지.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는 그 당시의 우리는 당연히 알지 못한단다. 나만 해도 난 줄곧 후회할 만한 선택, 그 중에서도 최악의 선택지만을 고르는 삶을 반평생동안 해왔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럼에도 이제는 그런 것들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들만을 곱씹다가 현재의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짓거리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으니까.
주니어, 운명이란 바꿀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 과거에 너무 얽매이지는 마려무나. 그것이 너의 두 눈을 가릴 것이기에.
그 사실을 꼭 명시하렴.
이 아비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으니, 너만이라도 이 점을 꼭 깊이 새겨두면서 살아가렴.
너는 분명히 잘 해낼 거란다. 너는 나보다는 라나를 닮아 훨씬 강한 사람이니까.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는 시점에서 난 참으로 행운아였다는 생각이 든단다.
라나가 그날 나에게 인사를 건넨 것이.
그리 하여 너의 아버지가 된 것이.
평생 지루할 줄만 알았던 삶에서 너와 네 엄마의 존재로 인해 조금은 소란스럽지만 다채롭게 살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
그러니 난 내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한들, 전혀 두렵지 않단다.
네가 너로만 계속 존재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그것으로 족하단다, 주니어.
그러니 이 글을 내 아들, 볼프강 슈나이더에게 바친다.
나의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에게.
P.S. 만약 내가 이 이후에 하러 가는 일이 잘 풀린다면, 아마 이 글을 네가 읽기도 전에 내 손으로 불태워버리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래도 난 이 글에 썼던 내용들을 너에게 ‘직접’ 말해줄 거란다. 조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되겠지만 말이구나. (웃음)
추신까지 다 읽은 볼프강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미소가 피어올라있었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울 수도 있을 것 같이 정말 복잡한 심경뿐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레온의 본심을 이런 식으로라도 알게 된 것에 대한 다행이었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과 달리 당황할 줄도 알고, 고뇌를 깊이 하는 모습에서 가산점을 얻어버린 것 때문인지.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고.
아무튼 레온의 유작의 첫 번째이면서 유일한 독자이자, 이 원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볼프강은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출판사를 열심히 찾아다녀야겠군.”
이거, 나 혼자만은 도저히 볼 수 없는 거였잖아…….
고고학자로서의 레온 슈나이더는 이미 세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볼프강이 이제 자신을 소개할 때, 그러한 레온 슈나이더의 가족이라고 말을 해도 되어 굳이 그런 수고로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만.
어쩐지 볼프강은 이 원고에 적혀져 있는 아버지로 사람들이 더 기억되길 바랐다.
물론 볼프강 역시 그쪽의 레온 슈나이더가 더 마음에 들기도 했고.
볼프강은 다 읽은 원고를 다시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번갈아가며 자신에게 계속해서 통신을 요청하던 팀원들의 연락을 드디어 받았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습니까.
“그런 사연이 있었어. 그런 건 눈치껏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예의라고.”
-그럼 이제 그 볼일은 다 보신 건가요?
“어, 지금 그쪽으로 바로 합류하도록 하지.”
-볼프쌤, 늦으면 안 돼요! 이미 많이 늦은 대(大) 지각쟁이가 되었지만!
“2호, 정상참작은 해주라고.”
-소마 말이 맞다. 선생님 녀석아, 반성문 100장 써야 한다? 세트가 다 검사할 거다?
“100장은 너무 하고 1장이 적당할 거 같은데.”
평소랑 다름없는, 익숙한 시끌벅적함에 볼프강은 그저 여유를 한껏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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